기획전시
한센병
- 한센병은 나균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 감염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권고하는 다제요법(MDT: 리팜피신, 답손, 클로파지민을 함께 사용)으로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하다.
- 병의 원인이나 치료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한센병은 매우 오랫동안 인류와함께 해 왔다. 원인균이 발견되고 치료약 복용으로 완치가 가능해진 지금도 한센병이 유전된다거나 불치병이라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 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편견으로 대하기도 한다.
관리정책
- 병의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과 추측, 미신 같은 풍문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G. A. Hansen)에 의해 나균이 발견(1873)되어 한센병은 감염병으로 인식되었으나, 1897년 제1회 국제나학회에서 “한센병은 격리 외에는 근절책이 없는 전염병”으로 개념이 정립되었다.
-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나병원을 설립해 환자를 격리하는 정책으로 19세기 말에 환자 수가 감소하는 효과를 얻고 있었지만, 여전히 병을 완치할 치료제는 없었다.
- 반면 같은 시기 아시아 각지에서는 여전히 많은 환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1904년도에 확인된 환자 수가 30,359명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1907년 3월 19일에는 법률 제11호 <나예방에 관한 건>을 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일본 내 한센인 격리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09년부터 격리가 시작되었다.
한센병 요양소의 설립
- 유럽의 격리는 ‘환자의 승낙에 의한 격리’, ‘집 근처에서 인도적 격리’, ‘합리적 퇴소의 보증’을 함께 논의했지만, 일본에서는 우생학에 근거한 전체 환자의 절대격리를 지향했다.
- 절대격리 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에도 이식되어 병원 또는 요양소라는 이름의 시설이 설치․운영되었다.
한국 국립소록도병원과 대만 낙생원, 일본 전생원 간략 연표
국립소록도병원 | 대만 낙생원 | 일본 전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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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Libera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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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병원과 낙생원, 전생원 비교

일본은 일찍부터 우생학을 받아들여 질병 문제를 근대 국가의 ‘격’과 연관 지었다. 이에 따라 한센병을 단속과 격리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전국에 13개 요양소를 만들어 한센병환자를 사회와 분리시켰다.
- 1국지 혜풍원의 콘크리트 벽, 높이가 2m로 환자의 도주 방지와 시선 차단
- 2다마 전생원, 호랑가시나무 울타리, 높이 3m로 도주 방지와 시선 차단
- 3장도 애생원, 육지와의 거리 22m, 물살이 빠르고 위험하여 자연 경계선으로 작동
한국과 대만에는 일제강점기 총독부에 의해 한센병 환자 격리를 위한 시설이 만들어졌다. 한국의 시설은 육지와 가까운 섬 전체를 병원으로 삼아 섬을 둘러싼 바다가 경계가 되었고, 대만은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산비탈을 끼고 조성되었다.
일본 내의 요양소는 물론 식민지에 만들어진 격리시설에서도 병사(유균)지대와 관사(무균)지대를 구분하여 요양소 내에서 또 한 번의 격리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어가비/경천애인비/ 이원작가비
일본 정명태후는 한센병환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식민지를 포함한 각지의 나요양소에 어가(가기 어려운 나를 대신하여 벗이 되어 위로하여라, つれづれの友となりてもなぐさめよ ゆくことかたきわれにかはりて)를 보냈다. 이를 새겼던 비석이 남아 있으며, 해방 후 한국과 대만은 비문을 바꾸어 제작(以院作家(1947), 敬天愛人(1961))하여 지금에 이른다.
납골당(1935년)/만령당(1937년)/애락원(1950년대)
한센병 환자는 사망 후 화장을 하여 요양소 안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격리의 삶을 살다가 죽어서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곳이 화장장과 납골당이다. 소록도에는 한센병에 걸리면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병에 걸렸을 때 한번, 해부할 때 한 번, 화장할 때 한 번.’ 낙생원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퇴원하고 싶다면 뒷산의 흰 연기가 되는 수 밖에 없다.’ 전생원의 납골당은 화장 후 유골을 안치할 곳이 없던 시기에 ‘적어도 사후에는 편히 잠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환자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중감방/감금실/반성실
감금실은 원규를 어긴 환자를 원장의 권한으로 구금하고, 감식(減食)하고 체벌할 수 있는 행형장이었다. 정식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된 환자가 있었던 교도소(감옥)와 구분된다. 일본에서는 감금실 이외에 특별병실로 <중감방>을 만들어 각 요양소에서 특히 반항적으로 지목된 환자를 따로 수용하기도 했다.
The Voices_히라사와 야스지, 리 티엔 페이, 남재권
히라사와 야스지(전생원)

고향
1927년, 일본 이바라키현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발병
14살이 되던 해에 병이 들었고, 그해 12월 24일에 전생원에 입소해 소년 기숙사에 배정되었습니다.
일본에서 프로민 합성에 성공했지만 치료제로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어머니는 고향의 전답을 팔아 비싼 약을 구해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병이 나아 돌아오면 함께 살아보자고 나를 기다려주신 거지요.
입원
1년이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을 믿고 입소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전생원에 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입소 후에는 더욱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도서관을 자주 찾았는데, ‘한센병에 걸린 놈이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어차피 납골당에 갈 처지’라며 괴롭히는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생활
사회에 복귀해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복용법도 모른 채 약을 먹으니 손에 장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이 원내 녹화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2급 정원사 자격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내 녹화 일을 하는 한편, 자치회 임원이 되어 환자라는 이유로 승차거부를 당하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도 없었던 시절 지역을 돌며 열심히 환자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요양소 내 약자로 차별받은 재일한국인이나 맹인들과 함께 우리의 인권과 기본권리를 얻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싸웠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전신신경통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으로 왼손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결혼, 가족
1950년 6월 25일, 전생원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의 조건은 단종수술이었습니다. 젊은 간호사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부끄러움을 당하고, 지상에서 땅 아래로 끝없이 끌어당기는 것 같은 수술의 고통을 견뎠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자녀가 없습니다. 대신 저는 아이들에게 생명에 대한 마음, 평화를 나누는 것에 관한 것들을 알리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아이들에게 따돌림이나 자살자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소중함, 부모님과 가족의 고마움, 아무리 과해도 지나치지 않을 꿈과 희망 등을 가르쳤습니다.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은 언제나 존엄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저와 함께 했던 아이들 중 일부는 지금 한센병 계몽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2014년에는 73년 만에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찾아 강연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어서 오라고 반겨주었고, 강연이 끝난 후에 “우리는 히라사와씨가 자랑스럽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바라는 것
한센병 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와 같은 인류학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남재권(소록도)

고향
1942년, 저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 없는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4형제 중 막둥이지요. 제가 태어난 곳은 여수 애양원이 바라다보이는 광양의 바닷가 마을입니다.
발병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8살 정도였을 겁니다. 학교에 갔다가 다음날 졸업했거든요. 입학해서 학교를 갔더니 선생님이 내 병을 알아보고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길로 졸업인거지요.
우리 어머니는 ‘이 병은 죽어야 낫는 병이다’ 생각하셨던 분이에요. 그래서 치료는 생각도 못하고 골방생활을 3년 넘게 했습니다.
입원
저는 모집으로 들어왔어요. 병든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들이는 거지. 어느 날, 혼자 있는데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어요. 골방생활을 오래 해서 걷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다음날 소달구지를 끌고 다시 왔습니다. 그 길로 나를 달구지에 태워서 광양읍으로 나왔습니다. 광양읍에서 하루 자고 여기저기서 모집돼 온 사람들까지 12명이 트럭을 타고 소록도로 왔지요.
생활
소록도에 입원했을 때 주변의 어른들이 ‘어린 것이 하나 들어왔는데 곧 죽겠다’ 그랬습니다. 그 정도로 약했다는 말이지요. 그랬던 제가 조금씩조금씩 살아나서 저보다 약한 분들 돌보는 일까지 하게 됐습니다.
어려서는 노인들 이발을 도맡아 했고, 교회를 다니면서 30년 동안 교회 종을 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새벽 세시 오십분에 첫 종을 치면, 많은 분들이 그 소리를 듣고 하루를 시작하고, 예배보러 나오는 거니까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자치회장을 역임하면서 소록도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박물관에서 관람객을 직접 만나서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 가족
소록도 입원하고 13년 만에 고향집을 찾아갔습니다. 집에 가려고 열심히 치료받고 수술도 여러 번 했어요. 서너 번 그렇게 집에를 다녔는데 큰 조카가 학교에 입학할 때쯤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 임종도 못지키고 살았습니다.
소록도 생활이 안정되어 가던 어느 날, 아주 약한 분이 입원을 했다고 도와주자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는 아무 연고도 없이 입원한데다 다른 사람보다 몸도 약한 사람은 이래저래 챙겨주는 분위기였지. 그래서 몸에 좋은 음식이나 영양제를 사다가 돌봤습니다.
이 분이 차츰 회복을 하니 사람들이 나한테 ‘불쌍한 처지에 서로 의지하며 살면 어쩌겠나?’ 그래.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한테는 사회에서 낳은 아들이 둘 있어요. 이놈들이 어려서부터 엄마 보러 소록도를 다녔는데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낳은 내 자식들이라 생각합니다. 둘 다 직장 잡고 가정을 이뤄서 이제는 손주들이 같이 찾아옵니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바라는 것
소록도에서 살아 온 세월이 70년입니다. 이 정도면 당당하게 ‘소록도가 내 집이다.’라고 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소록도에 계시는 분들 나이가 80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분이 떠나시는 날까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같은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이 소록도에 배어 있으니 그냥 없애버리지 말고 남길 것은 남기고 보존할 것은 보존해서 교훈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첨배(낙생원)

고향
1935년, 저는 대만 동부의 화련(花蓮)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집은 전기 관련 사업과 여관,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서 화련에서 제법 잘 살았지요.
발병
8살 때 발이 너무 아팠는데 그때부터 내 신경통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12살이 됐을 때는 얼굴에 반점이 생기고 이 병이 표가 나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안 가본 한의원이 없을 정도였어요. 약도 많이 먹었지만 나아지지 않았지요.
그때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어도 중학교에 입학해서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입원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경찰과 낙생원의 지도원이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집까지 찾아와 내 손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강제로 끌려가게 된거지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자고, 버스로 의란(宜蘭)으로 이동해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에 도착했습니다. 대동(臺東)과 화련에서 온 우리들 18명은 ‘나병 전용차’라고 쓴 종이가 붙은 열차의 마지막 칸에 앉아있었습니다.
생활
17살 때부터 병원에서 간병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손발이 민첩하고 좋았기 때문에 주사도 놓고 검사도 하고, 엑스레이실에서 사진 현상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고 도박에 중독되었을 때,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화를 내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매월 보내던 돈을 끊어버리셨지요. 덕분에 저도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살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사를 시작했고, 사찰을 보수하는 건축일도 했습니다. 결혼을 한 후로 20년 넘게 트럭운전도 했지요.
결혼, 가족
신경통으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 불교회에서 젊은 환자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아내를 알게 되었습니다. 서른세 살에 만난 그녀는 저처럼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빌려주곤 했습니다. 제에게 카메라가 있어서 그녀가 집으로 보낼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다 친해졌지요. 만난 지 3년이 지나서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첫째딸은 입양했고, 아내의 바람대로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부부 중 한 명의 퇴원을 강요했고, 나는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감염이 염려되어 아이는 병원 밖 보모에게 맡겨졌고 휴일에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서너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병원으로 데려와 키웠습니다.
우리 부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대학까지 가르쳤지요.
딸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한센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너무나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서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라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라는 것
우리에게 남은 중요한 문제는 한센병이 사라지기 전에 한센병의 기억과 역사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입니다.
낙생원의 많은 부분이 철거되어, 이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타이베이 시립 동물원을 이전하는 일도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낙생원 철거 과정에서 원민들은 2년 만에 강제이주를 해야했습니다.
모든 인류는 존엄합니다. 존엄한 모든 인류의 역사는 함부로 지워서도, 지울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필로그
개원 제109주년 기념 전시 <The Voices>는 아시아 3개국의 한센병 격리시설을 소개하고, 각 기관에서 평생을 살아 온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치료법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던 강제격리는 효과적인 치료약이 개발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격리를 강제하는 법이 삭제되었어도 퇴원자는 드물었고, 퇴원하더라고 정착마을로 가거나 자신의 병력을 숨긴 채 살아야 했습니다.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이웃으로부터 차별을 받고, 사회와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태양이 머리 위에 빛나고 있음에도 유무형의 벽에 갇혀 어둠 속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이제 우리가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손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요.
<The Voices> 전시를 통해 질병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있는 귀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 전시를 허락해주신 ひらさわやすじ(平澤保治)님과 Lee Tien Pei(李添培)님, 남재권님, 기획과 준비를 함께 해 준 김귀분님과 Winnie Wu(巫宛蓉)님께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