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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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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그물 그 안에 담긴 삶의 의지 기획전 포스터돌그물 그 안에 담긴 삶의 의지

소록도라는 작은 섬을 둘러싼 24개소 독살을 소개하고, 역사문화적 가치로서 보존되어야 할 소록도 바다와 어업유산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독살은 바다에 설치된 함정어구로 물이 들어올 때 함께 왔던 물고기들이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돌을 쌓아 만들었다.

독살에 대하여

독살은 순우리말인 '독(돌)'과 '살(화살)'이 만나 만들어진 말이다.
그럼 독살은 돌로 만든 화살일까?

어로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우리 선조들은 가까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물이 들어올 때 함께 왔던 물고기들이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바다에 그물 같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갈대나 대나무를 촘촘히 박고 엮어서 울타리를 쳤다.
이렇게 갯벌에 꽃은 나무를 물고기 잡는 화살로 여겨 '어살'이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는 '漁箭'이라고 썼다.
나무 대신 돌을 사용한 어살은 '독살'이 되었다. 독살은 독발, 뚝발, 석방렴 등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규모가 큰 어살은 길이가 무려 750m에 달했다고 하니 웬만한 사람은 만들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

"夫漁箭功役甚大 非貧民所能爲也"
(부어전공역심대 비빈민소능위야)

"대체로 어살은 공역이 매우 커서 가난한 백성이 스스로 경영할 바가 아니다." (중종실록, 중종4년 5월 임인)

위 기록에서 보듯이 개인이 어살을 경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공동운영형태가 등장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기 잡는 기술이나 도구는 발전을 거듭했다. 사람들은 독살에 고기가 들기를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바다를 공략하는 쪽을 택했다. 자연스럽게 독살은 쇠퇴해갔고 지금은 그저 돌무더기로 남았다.

소록도 독살이 만들어 지기까지...

소록도에는 24개의 독살이 있다.
1947년에는 소록도에 6,254명이 살았다. 한정된 공간과 자원을 많은 사람이 함게 하기란 녹록한 일이 아니다. 특히 먹ㄱ을 것이 부족했다.
최소한의 공동구역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땅은 개간되었고 푸성귀며 각종 작물이 재배되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급기야 소록 사람들은 바다를 개간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독살이다.

소록도의 독살은 뜻있는 몇 사람이 어울려 돌을 나르고 담을 쌓아 바닥에 그물을 치듯 엮어 만들었다.
옆 마을의 독살을 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독살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각 마을마다 2개, 3개가 만들어지기를 거듭하여 24개가 되었다.
육지에서 독살이 쇠퇴하던 시기에 소록도에서는 부지런히 독살 쌓기가 계속 되었다.

소록도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민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소록도의 정서를 배우며 자란 사람도 있었다.
독살 쌓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었고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다. 오로지 끈기와 의지로 초보 기술자의 설움을 극복했다.

소록도 독살은 80년대까지 유지되다가 관리할 사람이 없어 현재는 파살 되었다.
지금도 소록 사람들은 파살 된 독살에서 해삼, 고동, 꼬막, 꽃게를 잡는 어로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소록도 독살은 소록도 사람들에게 의해 여전히 작동 중이다.

소록도 주민이 직접 전해주는 독살이야기
독살로 이동중인 주민

독으로 딱 박아서, 물이 최고로 들면 거기 고기가 발 너머로 싹 다 들어온다.
다 들어와 갖고 그놈이 인자 물이 나가면 나갈 줄을 모르고 발 안에서 후덕후덕후덕후덕 막 뛴다.
숭어가 제일 많이 잡히고 멸치도 잡고 오징어, 낙지 오만 거 다 잡히제.

남생리 주민

17살에 소록도에 처음 와서 뭘 몰랐을 땐디, 물빠지 바다에 보니 고기가 버글버글해.
좋아서 큰 그릇에 많이 담어다가 묵고 했는디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이 있어.
여기서 애 낳고 살면서 그 발(독살) 주인네랑도 잘 지냈어.

동생리 주민

게잡으러 날마다 가야제.
그것이 내 업이고, 거기가 내 직장이라

중앙리 남재권

24개의 독살

소록도 독살

소록도의 독살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에 집중 조성되었다. 독살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돌은 주변에서 가져왔다. 큰 돌을 옮겨야 할 때는 여럿이 조를 이루어 밧줄과 목도를 이용했다.

독살은 복잡한 해안선이 들고 나는 만(灣)에 만들어졌다. 소록도 독살은 1980년대 후반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독살의 위치는 중앙리, 신생리, 구북리, 서생리, 동생리 등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구북리의 큰 독살과 작은 독살이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다른 마을의 것은 무너진 채 흔적을 확인 할 수 있을 정도이며, 일부는 완전히 없어져 몇 개의 돌만 띄엄띄엄 남아 있다.
소록도 사람들은 독살을 ‘발’이라고 부른다.

소록도 독살 위치도 24개, 위치목록은 아래 참조, 24개 중 일부(2번, 8번, 9번, 13번, 19번, 20번, 21번, 22번, 23번) 사진자료 있음

소록도 외곽 해안가에 24개의 독살이 자리잡고 있음 / 소록도안내소를 기준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설명함

  1. 1번 : 소록대교를 따라 소록도안내소 입구 뒤 중앙리 소나무숲길 초입 해안가
  2. 2번 : 소나무숲길이 끝나는 지점 중앙리 해안가
  3. 3번, 4번 : 신생리길 해안도로 초입지점의 해안가
  4. 5번 : 신생리길 해안도로 중간지점의 해안가
  5. 6번, 7번 : 신생리길 해안도로 끝지점을 지나 소록도 최북단 지점의 해안가
  6. 8번, 9번 : 6번, 7번 독살의 반대쪽으로 구북리 초입지점의 해안가
  7. 10번, 11번 : 구북리사무소 인근 해안가
  8. 12번 : 십자봉 소풍길을 따라 소록도 최서단 해안가
  9. 13번 : 서생리 자혜의원 인근 해안가
  10. 14번 : 자혜의원과 남생리사무소 중간지점 해안가
  11. 15번, 16번 : 남생리사무소 기준 서쪽방향 해안가
  12. 17번, 18번 : 남생리사무소 기준 동쪽방향 해안가
  13. 19번, 20번 : 동생리사무소, 동성교회 앞 해안가
  14. 21번, 22번, 23번 : 동생리 1구 양지회관길 끝지점 내 마을 끝 해안가
  15. 24번 : 거금대교 기준 서해방향 해안가
  • 2번 중앙리 독살 사진
    02중앙리 독살
  • 8번 구복리 작은 독살 사진
    08구복리 작은 독살
  • 9번 구복리 큰 독살 사진
    09구복리 큰 독살
  • 13번 서생리 2번 독살 60년대 사진
    13서생리 2번 독살 60년대
  • 13번 서생리 2번 독살 현재 사진
    13서생리 2번 독살 현재
  • 19번, 20번 동생리 큰 독살, 작은 독살 사진
    1920동생리 큰 독살, 작은 독살
  • 21번, 22번, 23번 동생리 1구 1,2,3번 독살 사진
    212223동생리 1구 1,2,3번 독살

마을풍경

신생리, 서생리, 중앙리
  •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주민1
  • 갯벌의 석양
  • 갯벌 전경
  •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주민2
  • 소록도대교가 보이는 갯벌
  • 소나무숲과 어우러진 갯벌 1
  • 소나무숲과 어우러진 갯벌 2
  •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주민의 조개바구니
  • 어르신들의 이용하는 전동스쿠터
  • 갯벌 풍경
  •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주민3
  • 채취한 조개
구북리, 남생리, 동생리
  • 섬풍경이 담긴 갯벌
  • 독살에서 작업 중인 주민1
  • 갯벌에서 작업 중인 주민 1
  • 갯벌에서 작업 중인 주민 2
  • 독살에서 작업 중인 주민2
  • 주민들이 사용하는 이동용 전동스쿠터
  • 갯벌에서 작업중인 주민 3
본문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