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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소록도 이야기- 병사성당

  • 등록자 :백미영
  • 담당부서 :운영지원팀
  • 전화번호 :061-840-0692
  • 등록일 :2021-05-14

소록도 병사성당 하단참고

소록도 병사성당

소록도에는 자신이 맞닥뜨린 운명에 좌절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결국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입도入島한 사람 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냈고, 함께 극복하며 살아냈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 끼리 얼러져 가족을 이루며 소록도의 정서를 이어왔다. 그렇게 살아낼 수 있도록 힘을 준 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런 종교 중 하나인 천주교가 소록도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된 것은 1935년 장순업 등 3명의 신자들이 입원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지속적인 전교활동으로 서서히 신자가 늘었고 1958년에는 신자 수가 1,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초기 병사지대에는 일정한 공소가 없어 마을 사무실이나 치료실 등에서 미사를 보다가 치료 본관 2층, 중앙운동장 귀퉁이에 자리한 수도관 등을 사용하게 된다.

1941년, 신축된 수도관,1960년, 천주교 공소로 사용되던 수도관과 당시 신자들의 헌금으로 조성된 종탑

소록도 이야기 병사성당02 하단참고

1960년 소록도 천주교는 직원지대와 병사지대 2개의 공소가 1개의 본당으로 승격 되어 초대 신부로 권 야고보(James Michael) 신부가 부임한다. 권신부는 부임하자 마자 병원의 허락을 얻어 교구청에 소록도 성당 건립을 건의하고 병사지대와 직원 지대에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한다. 2번지 병사성당 터는 중앙리와 동생리에 걸쳐있고, 공회당 언덕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 낙점되었다. 산자락 일부와 밭을 포함한 땅은 대략 200여 평이었다. 이 곳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했다. 성당을 짓기 위해 신자들은 모래와 자갈을 나를 생각으로 여러 차례 의논을 하고 있었지만 성당 건축의 첫 삽을 뜨는 일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그 이유는 성당 터로 낙점된 밭에 마늘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4월이 되어 풋마늘이나마 어지간히 캘 수 있게 되자 기공식을 하게 된 것이다. 3월 17일에 마늘 캐는 작업을 공지하여 1961년 4월 14일부터 작업을 했다. 우리는 마늘 작업을 마친 후 성당 터 평탄 작업을 하여 4월 14일부터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벽돌 찍는 일을 고흥에서 온 기공들만 했다. 그러나 일손이 부족하여 진척이 없자 신자들에게도 벽돌 찍는 일을 가르쳤다.”(이◯래, 1961년 입원)

1961. 5. 10. 병사성당 건축현장, 광주대교구 현 하롤드 헨리 대주교 방문

소록도 이야기 병사성당03 하단참고

건축에 필요한 자갈과 모래는 물이 빠진 바닷가에서 가져왔다. 가까운 동생리, 남생리, 서생리에서 모래를 나르다 부족하자 장안리까지 가서 모래를 퍼왔다. 성당 주변 담을 쌓을 돌도 마찬가지였다. 건강한 신자들은 노동을 했고, 약한 신자들은 기도로 마음을 모았다.

1963년 이후 2번지 병사성당 전경, 중앙공원과 구라탑

성당의 평면도는 마치 거북이와 같아 보인다. 성당 입구를 머리로 하여 고해실과 성모상 자리가 앞발이고, 제대 쪽은 꼬리, 양쪽 제의실이 뒷발의 형태이다. 애초부터 건강과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를 염두에 두고 건축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결국 삶을 살아내고야 만 소록도 사람들의 흔적이 100년 넘는 시간 동안 거북처럼 느릿느릿 제 모습을 지켜온 덕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 감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록도 병사성당은 소록도 사람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여 절망에서 희망을 만들어 낸 건축물로써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6월 14일 등록문화재 제659호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