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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마가렛 이야기_M치료실과 두 할매

  • 등록자 :백미영
  • 담당부서 :운영지원팀
  • 전화번호 :061-840-0694
  • 등록일 :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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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마가렛 이야기_M치료실과 두 할매1) 1962년 6월 20일 소록도병원(조창원 원장)과 천주교 광주대교구(현(玄) 하롤드 헨리 대주교)가 [보육원 운영협약]을 체결한다. 그 당시 환자 자녀 약 230명이 보육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보육소는 일제강점기부터 운영되고 있었고 영아는 보통 여자독신부 에서 10세 전후 동안 자라다가 보육소로 입소했다. 마리안느는 1962년 2월 24일 소록도에 들어왔고 같은 해 6월부터 영아원을 설립 하여 운영하였다. 영아원 입소 대상은 출생 후 만 3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영아원 운영은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후원과 구호물품을 지원받아 하였고 병원에서는 영아원의 보육사업과 아동 환자 진료를 위해 마리안느 일행의 장기거주를 허가하였다. 현(玄) 하롤드 헨리 대주교의 초청으로 소록도 생활을 시작한 마리안느는 1965년 영아원 운영이 사정에 의해 병원으로 환원되자,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이후 다시 한국에 입국하여 1966년 4월부터 마가렛과 함께 학령기에 발병하여 소록도에 입원한 아동환자를 위한 [아동치료실]을 열어 부모를 떠나와 투병하는 아동들의 치료에 전념한다. 아동치료실(1975년) 1) 이 글은 김오수(퇴직 직원), 이경래・김시영(신생리), 남재권(중앙리)님과의 인터뷰(2022년 2월 18일)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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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과 영양공급이 부족한 아동들에게 치료뿐 아니라 충분한 영양상태 회복을 위해 한 컵의 분유와 함께 영양제를 먹을 수 있게 하였고, 특히 양성 아동환자 치료에 전념하여 심리적 지지와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 당시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다양한 외국산 희귀 약품을 구매하여 치료에 도움을 주었고 한센병 치료제인 클로파지마인(람프렌)은 병원보다 먼저 투약 치료하였다. 아동치료실의 약품 관리는 마가렛이, 상처치료 및 전체 살림은 마리안느가 담당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아동환자수가 줄어들자 분유배식과 외국약품제공 수혜자가 일반 환자쪽으로 바뀌어 간다. 아침 일찍부터 병동을 돌며 입원해 있는 약한 고령의 환자 들에게 한 컵 한 컵 직접 분유를 따라주었고 마을에서 치료본관에 진료받으러 온 사람들이 잠시 아동치료실에 들를 경우 따뜻한 분유 한 잔과 함께 담소가 있었다. 물론 상시로 두 할매 방을 들르는 사람도 있었다. 좁은 아동치료실이었지만 하루도 소록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문전성시였다. 치료본관 1층에는 아침부터 각 과의 진료와 치료를 대기하는 환자들이 많아 혼잡 하였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는지 “짐이야 짐이야” 소리를 내든, 손뼉을 치든 해야 사람들로 혼잡한 복도를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영양공급이 필요한 이에게는 약 한 달분의 분유를 분유 깡통에 분배하였는데 이것을 얻기 위해 각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아동치료실 문 앞에 기다려 줄 서는 사람이 많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국제사회에 한국의 위상이 알려지면서 외국에서 원조가 서서히 줄어들었고 두 할매를 후원하던 오스트리아 단체도 이런 영향을 받아 원조 가 점차 감소해 갔다. [아동치료실]은 옛 치료본관 1층 현재 한울센터 배움마당 자리에 위치하였다가 1987년 지금의 본관건물이 세워지자 1층 가장 안쪽 방(현 약제과장실)으로 옮겨졌고 [M치료실]이라 부르게 된다.

M치료실(1996년)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2016-1916 SONAMU SOrokdo NAtinal MUseum